[이민구] 만나지 못해서 - 동주(東州) 이민구(李敏求)
각주가 많은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나, 부득이한 사례가 있기도 하다.
이 작품은 제1수 여덟 분, 제2수 여섯 분의 행적을 이해하지 못하고선 내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이 작품은 2015년 1월 20일 졸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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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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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나지 못해서[2수○상편의 여덟 사람은 술 친구요, 하편의 여섯 사람은 시 친구이다.]1)
不見[二首○上篇八公酒伴。下篇六公詩伴。]
東州李敏求作
驛使回征駕。龍門話索居。仍傳林邑信。獨阻柳村書。
鏡浦移家後。江陽去郡初。典籤猶客寓。判事復何如。
[卞三近誠之。李晉英康侯。韓會一亨甫。韓亨吉泰而。許惟善。金孝建善述。李公益士先。趙景禛綏之。]
淮上涼秋動。汾西落照明。雲連散騎省。地闊晉康城。
千日湖南興。三年峽裏情。時危催別恨。回首一霑纓。
[申東陽翊聖君奭。朴錦陽瀰仲淵。李白洲明漢天章。李玄洲昭漢道章。鄭畸翁弘溟子容。李澤堂植汝固。]
동주(東州) 이민구(李敏求) 지음
驛使回征駕 역사(驛使)는 수레를 되돌리고2)
龍門話索居 용문(龍門)은 외롭게 숨어사는 이야기를 하네3)
仍傳林邑信 임천(林川)에선 곧바로 편지가 왔는데4)
獨阻柳村書 유촌(柳村)에선 유독 편지가 막혔네5)
鏡浦移家後 경포(鏡浦)는 이사한 뒤이고6)
江陽去郡初 강양(江陽)은 합천을 떠난 직후라네7)
典籤猶客寓 전첨(典籤)은 아직도 객지에서 머무는데8)
判事復何如 판사(判事)는 또 어떠하신가9)
[변삼근 성지(卞三近誠之), 이진영 강후(李晉英康侯), 한회일 형보(韓會一亨甫), 한형길 태이(韓亨吉泰而), 허보 유선(許惟善), 김효건 선술(金孝建善述), 이공익 사선(李公益士先), 조경진 수지(趙景禛綏之)]
淮上涼秋動 회강(淮江)에는 서늘한 가을 시작되고10)
汾西落照明 분서(汾西)에는 저무는 석양빛 선명하네11)
雲連散騎省 구름은 산기성(散騎省)에 잇닿아 있고12)
地闊晉康城 진주성(晉州城)은 광활하기도 해라13)
千日湖南興 호남(湖南)은 삼 년 동안 흥성했는데14)
三年峽裏情 첩첩산중에는 삼 년 동안 애틋했었네15)
時危催別恨 다급한 때라 한스러운 이별 재촉하니
回首一霑纓 돌아볼 때 떨어진 눈물 한 방울 갓끈 적시네
[동양위 신익성 군석(申東陽翊聖君奭), 금양위 박미 중연(朴錦陽瀰仲淵), 백주 이명한 천장(李白洲明漢天章), 현주 이소한 도장(李玄洲昭漢道章), 기옹 정홍명 자용(鄭畸翁弘溟子容), 택당 이식 여고(李澤堂植汝固)]
<각주>
1) 이 시는 이민구 선생의 『동주선생집(東州先生集)』 철성록3(鐵城錄三)에 실려 있는데, 철성록은 영흥(永興)의 옛 철옹성(鐵甕城 : 鐵甕縣)에 유배된 1637년(인조 15년)부터 1643년(인조 21년)까지 7년간 지은 작품들이다. 이 시들을 뒤에 연도별로 한 권씩 엮었으므로 이 시는 1639년(인조 17년)에 지은 것임을 알 수 있는데, 하편(下篇) 첫 구에 ‘양추(涼秋)’라 하였으므로 이 시가 지어진 구체적인 시기는 1639년 가을(9월)경으로 추정된다.
2) 역사(驛使)는……되돌리고 : ‘역사(驛使)’는 “급한 연락을 취하기 위해 역마(驛馬)로 보내는 심부름꾼”을 뜻한다. 병자호란 후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간 소현세자의 임시 환국을 앞두고 봉림대군만 홀로 심양에 남게 되자 좌의정 신경진 선생이 봉림대군을 모실 재신(宰臣) 한 사람을 심양으로 보낼 것을 건의하였다. 이 일로 변삼근(卞三近) 선생이 추천되었는데, 인조가 부빈객(副賓客) 신계영(辛啓榮) 선생을 보내도록 명한 일이 있다. ‘역사(驛使)가 수레를 돌렸다’는 표현은 바로 이때의 일을 비유한 듯하다.
3) 용문(龍門)은……하네 : 『동주선생집(東州先生集)』 시집(詩集) 권4 철성록4(鐵城錄四) <봄날에 시골 사는 이강후를 생각하다(春日懷李康侯村居)>는 이진영(李晉英) 선생을 소재로 한 작품인데, 거주지가 용문산(龍門山 : 지금의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으로 묘사돼 있다. 이로 보아 제2구의 ‘용문(龍門)’은 이진영 선생을 비유한 것임을 알 수 있다.
4) 임천(林川)에선……왔는데 : 원문 ‘林邑’은 ‘林川邑’을 줄인 말로 ‘임천 고을’ 또는 ‘임천 고을 수령’이라는 뜻으로 지금의 충남 부여 지역이다. 또한 원문 ‘信’은 ‘편지, 서찰’ 또는 ‘소식’의 뜻으로 쓰였다. 한회일(韓會一) 선생은 임천(林川)을 비롯한 열 고을의 수령을 역임한 것으로 묘갈명에 기록돼 있으며, 『승정원일기』 1639년(인조 17년) 9월 15일조 등에도 ‘임천 군수(林川郡守)’로 적혀 있다. 이로 보아 제3구는 한회일 선생에 대한 내용임을 알 수 있다.
5) 유촌(柳村)에선……막혔네 : 원문 ‘柳村’은 한형길(韓亨吉) 선생의 호(號)이다. 이 작품이 쓰여지기 직전인 1639년(인조 17년) 8월 26일자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병조참의로 재임 중인 한형길 선생은 자신이 맡고 있는 직책이 과중하여 적임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교체해 달라는 상소를 올리고 있었다.
6) 경포(鏡浦)는……뒤이고 : 원문 ‘鏡浦’는 허보 선생의 생가(生家)로 허보 선생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1618년(광해군 10년) 8월에 남대문 격서 사건으로 허균 선생이 역모 혐의로 능지처참을 당하고, 허보 선생은 벽진군(碧珍郡)으로 귀양갔다가 1623년(인조 원년)에 풀려나 지금의 서울시 마포인 서호(西湖)의 삼포(三浦)에 이안당(易安堂)을 짓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동주선생집』 문집(文集) 권2 <이안당서(易安堂序)>, 『조선왕조실록』 1618년(광해군 10년) 10월 25일조,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권59 허보 묘갈명 참조.
7) 강양(江陽)은……직후라네 : 원문 ‘江陽’은 경남 합천(陜川)의 옛 이름으로 합천현감을 역임한 판결사공(金孝建)을 가리킨다. 『화김래파사적약변(花金來派事蹟略弁)』의 판결사공(金孝建) 행장에 의하면, 1639년(인조 17년)에 합천현감으로 재임 중 5월에 사헌부의 논의로 파직되어 6월에 고향 두릉리에 귀향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8) 전첨(典籤)은……머무는데 : 원문 ‘典籤’은 종친부 전첨을 역임한 이공익(李公益) 선생을 가리킨다. 이민구 선생이 지은 이공익 선생 묘갈명에 음직으로 별제(別提)로 제수되어 벼슬길에 나아가 사헌부 감찰, 형조좌랑 등을 역임한 뒤 외직으로 나갔다가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호조정랑 및 종친부 전첨을 역임한 것으로 적혀 있다.
9) 판사(判事)는……어떠하신가 : 이민구 선생이 지은 조경진(趙景禛) 선생 묘갈명에는 첨지중추부사, 공조ㆍ형조의 참의(參議), 연안ㆍ정주ㆍ여주 목사를 역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원문 ‘判事’는 구체적으로 어떤 관직을 가리키는지 확인하지 못했다. 다만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이 시가 지어진 때보다 몇 개월 앞선 1639년(인조 17년) 6월 26일조에 조경진 선생의 관직이 ‘예차(豫差)’로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이와 관련된 관직인 듯하다. ‘예차(豫差)’는 어떤 특정한 직임을 임시로 맡아 보는 정원(定員) 외에 더 선발한 관원을 가리킨다.
10) 회강(淮江)에는……시작되고 : 원문 ‘淮’는 신익성(申翊聖) 선생이 창연정(蒼然亭)을 지은 곳으로 한강 상류인 두물머리[二水 : 洌水]에 붙인 이름이다[『낙전당집(樂全堂集)』 권8 창연정설(蒼然亭說) 참조]. 원문 ‘涼秋’는 ‘음력 9월’의 별칭으로 가을을 뜻한다. 신익성 선생은 병자호란 때의 척화오신(斥和五臣) 중 한 사람으로, 본관은 평산(平山), 자(字)는 군석(君奭), 호(號)는 낙전당(樂全堂)ㆍ동회거사(東淮居士)이다. 선조 임금의 부마(駙馬)로 정숙옹주(貞淑翁主)와 혼인하여 동양위(東陽尉)에 봉해졌다.
11) 분서(汾西)에는……선명하네 : 원문 ‘汾西’는 선조(宣祖)의 딸 정안옹주(貞安翁主)와 혼례를 올린 박미(朴瀰) 선생의 호이다. 박미 선생은 선조 임금의 정안옹주(貞安翁主)와 혼인하여 금양위(錦陽尉)에 봉해졌다가 뒤에 금양군(錦陽君)으로 개봉(改封)되었다. 어려서부터 문예와 서도(書道)에 뛰어나 일가를 이루었다. 조카가 박세채(朴世采) 선생이다.
12) 구름은……있고 : ‘산기성(散騎省)’은 ‘병조(兵曹)’의 다른 이름이다. 『승정원일기』와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이명한 선생은 1639년(인조 17년) 5월 12일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임명돼 8월 6일 도승지(都承旨)로 이임할 때까지 병조에서 근무하였다.
13) 진주성(晉州城)은……해라 : 원문 ‘晉康城’은 경남 진주(晉州)의 다른 이름인데, 이소한(李昭漢) 선생이 진주목사로 임명되었기에 이러한 표현을 한 것이다.(『신증동국여지승람』 권30 경상도 진주목 및 『승정원일기』 인조 17년 6월 20일조 참조)
14) 호남(湖南)은……흥성했는데 : 정홍명 선생은 송강 정철 선생의 아들로, 이민구 선생이 지은 만사(輓詞)를 보면 흉금을 털어놓을 정도로 막역한 사이였다. 『승정원일기』와 박세채 선생이 지은 묘지명 및 신독재 김집 선생이 지은 <묘비음기(墓碑陰記)> 등에 따르면, 정홍명 선생은 부제학과 대사성을 역임한 뒤 외직으로 나갈 것을 청해 1635년(인조 13년) 3월 24일 통정대부로서 행직(行職)으로 김제 군수(金堤郡守)에 임명되었다. 이후 3년간 임기가 만료될 때까지 선정을 베풀었다. 원문 ‘千日湖南興’은 바로 이때의 일을 표현한 것이다. 『승정원일기』 인조 13년 3월 24일조, 인조 15년 2월 22일조, 『기암집(畸庵集)』 부록(附錄) <묘비음기(墓碑陰記)>, 『기암집(畸庵集)』 부록(附錄) <사헌부 대사헌 기암 정 공 묘지명(司憲府大司憲畸庵鄭公墓誌銘)>, <만사(輓詞)> 이민구 찬(李敏求撰) 참조.
15) 첩첩산중에는……애틋했었네 : 이식 선생이 자찬 묘지명 성격으로 지은 <택구거사 자서(澤癯居士自敍)>에 따르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어머니와 식솔을 충북 단양의 영춘(永春) 산중으로 피신시키고 자신은 인조를 따라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1637년(인조 15년) 6월에 어머니의 병환 소식을 듣고 충북 제천의 임시 거처로 달려갔다가 7월에 모친상을 당해 경기도 지평현(砥平縣 : 지금의 경기도 양평)에 장사지내고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한 것으로 적혀 있다. 제6구는 바로 이때의 일을 표현한 것이다. 『택당선생집(澤堂先生集)』 별집(別集) 권16 <택구거사 자서(澤癯居士自敍)> 참조.
• 출전 : 『동주선생집(東州先生集)』 시집(詩集) 권3 철성록3(鐵城錄三)